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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캉스(vacances)는 라틴어 ‘vacare’, 즉 ‘비우다’에서 온 말이다. 일상을 비우고 자유로워지는 시간. 나라마다 여름을 보내는 방식은 다르지만 그 본질은 하나다. 프랑스·스페인·일본·한국이 여름을 대하는 전혀 다른 방식을 들여다본다.
바캉스라는 단어 자체가 프랑스에서 왔다. 1936년 프랑스 노·사·정은 연간 2주의 유급휴가 의무화를 담은 마티뇽 합의를 이뤄냈고, 이후 휴가 기간은 꾸준히 늘어나 1985년 미테랑 대통령 시절 5주로 확대되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프랑스인들은 ‘일 년 열두 달 중 한 달의 바캉스를 위해 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여름휴가를 삶의 핵심으로 여긴다.
매년 7~8월이 되면 파리와 리옹 같은 대도시는 텅 비다시피 한다. 프랑스어에는 바캉스가 만들어낸 독특한 단어까지 있다. 7월에 휴가를 떠나는 사람들은 ‘쥐에티스트(juillettiste)’, 8월에 떠나는 사람들은 ‘우티앵(aoûtien)’이라 부른다. 한꺼번에 이동하는 모습이 양떼 같다 해서 언론은 이를 ‘이동 목축’이라는 뜻의 ‘라 트랑쥐망스(la transhumance)’라고도 표현한다. 북쪽 노르망디 해변, 서쪽 대서양 연안, 남쪽 지중해 코트다쥐르까지 프랑스 전역이 바캉스 목적지로 변한다.
프랑스 바캉스의 특징은 방향이 다양하다는 점이다. 지중해 리조트와 캠핑장, 피레네산맥 트레킹, 시골 별장이 모두 동등하게 인정받는 휴가 방식이다. 정부와 지자체는 저소득층 아동을 위한 방학 캠프 ‘콜로니 드 바캉스’를 운영해 바캉스가 계층 구분 없이 모두의 권리가 되도록 지원한다. 소득이 줄어도 바캉스 예산은 크게 줄지 않는다는 통계가 있을 만큼, 프랑스인에게 바캉스는 선택이 아닌 삶의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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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여름은 뜨겁고 느리다. 남유럽 특유의 강한 햇살이 내리쬐는 한낮에는 상점과 식당이 문을 닫고 사람들이 낮잠을 자는 ‘시에스타(siesta)’ 문화가 지금도 이어진다. 더위를 피해 오전에 활동하고, 점심 후에는 쉬고, 해가 기울면 다시 거리로 나오는 것이 스페인식 여름 리듬이다. 저녁 9시가 넘어야 식사를 시작하고, 한밤중까지 광장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스페인의 여름은 개인 휴양보다 공동체가 함께 즐기는 피에스타(fiesta)의 성격이 강하다. 매년 7월 팜플로나에서 열리는 산 페르민 축제는 황소 떼가 거리를 달리고 사람들이 그 앞을 뛰어가는 ‘엔시에로(encierro)’로 세계에 알려진 행사다. 붉은 스카프를 두르고 흰옷을 입은 수만 명이 좁은 골목을 함께 달리는 이 장면은 매년 전 세계 100만 명 이상을 팜플로나로 불러 모은다. 8월에는 발렌시아주 부뇰에서 라 토마티나 축제가 열린다. 참가자들이 수십 톤의 토마토를 서로에게 던지며 뒤엉키는 이 행사는 한국의 보령머드축제와 비교될 만큼 체험 중심의 강렬한 여름 축제로 자리잡았다. 스페인 여름의 핵심은 함께 달리고, 함께 던지고, 함께 웃는 것이다.

일본의 여름은 축제와 불꽃놀이로 기억된다. 7~8월 전국 곳곳에서 지역 마츠리(祭り)가 열리고, 저녁 하늘을 수놓는 하나비(花火) 대회가 이어진다. 유카타(浴衣)를 입고 마츠리에 나가 다코야키와 카키고리(빙수)를 먹는 것이 일본 여름의 전형적인 풍경이다. 도쿄 스미다가와 하나비타이카이, 나니와 요도가와 하나비타이카이 등 대형 불꽃 대회는 수십만 명의 인파가 몰리는 여름 최대 행사로 꼽힌다.
8월 중순에는 오본(お盆) 기간이 찾아온다. 조상의 혼을 맞이하고 보내는 전통 의례로, 많은 직장인이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여름휴가를 쓴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귀성 행렬이 이어지고 가족이 함께 모여 묘지를 찾는 오본 문화는 한국의 추석과 비슷한 정서를 품고 있다. 일본의 여름휴가는 프랑스처럼 한 달씩 쉬는 문화가 아니다. 법정 유급휴가가 있지만 실제로 모두 소진하는 문화가 자리잡지 않아 오본 전후 1~2주가 사실상 여름 성수기를 이룬다. 대신 그 짧은 기간 동안 온천 료칸에서의 1박 여행, 바닷가 민박, 가족 여행이 집중적으로 이루어진다. 2026년 글로벌 여름 여행 트렌드 조사에서 일본이 스페인에 이어 세계 2위 여행지로 꼽힌 것은 이 다채로운 여름 콘텐츠가 세계 여행자들에게도 강하게 어필하고 있다는 증거다.

한국에서는 7월 말부터 8월 초까지의 1주일 남짓이 전 국민 공통의 여름 성수기다. 유급휴가 제도는 있지만 긴 휴가를 쓰는 문화가 충분히 정착되지 않아 짧은 기간에 휴가가 집중되는 구조다. 해운대·광안리·강릉 경포대 같은 대표 해수욕장이 단 며칠 만에 수백만 명의 인파로 가득 차는 현상은 이 집중도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러나 최근 한국의 여름 문화는 빠르게 다양해지고 있다. 보령머드축제·부산바다축제·대구치맥페스티벌 같은 도시형 여름 축제들이 해수욕장 피서 문화를 대체하거나 보완하고 있으며, 계곡과 캠핑을 중심으로 한 ‘촌캉스(시골+바캉스)’ 트렌드도 확산 중이다. 한강 피크닉, 루프탑 카페, 야외 영화제처럼 도심 안에서 여름을 즐기는 방식도 자리를 잡았다. 프랑스처럼 한 달을 통으로 비우는 바캉스 문화는 아직 낯설지만, 여름을 단순히 더위를 피하는 시간이 아니라 문화를 즐기고 경험을 채우는 시간으로 바라보는 시각은 분명히 넓어지고 있다.
프랑스는 한 달을 비우고, 스페인은 낮을 쉬고 밤을 달리고, 일본은 마츠리와 불꽃으로 계절을 보내고, 한국은 짧고 뜨겁게 몰아친다. 어느 방식이 옳고 그른 것이 아니다. 각 나라가 역사와 노동 문화, 기후와 공동체 방식 속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온 여름의 언어가 다를 뿐이다. 바캉스의 어원이 ‘비우다’인 것처럼, 무엇으로 채우든 일상을 한번 비워내는 시간의 가치는 어느 나라에서나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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